내가 어릴때 다니던 영어학원은 첫 시간에 나를 소개할 때 내 이름을 정해야했다. 이미 수년을 사용한 내 이름 말고, 영어식 이름을 그 자리에서 정해야했다. 그 당시 이름이 뭔지도 잘 기억이 안나는데 아마도 Jay 혹은 Jason 이 둘중 하나였던것 같다.

예전에 취직한 대학선배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선배의 회사에선 수평적 문화를 조성하기위해서 다들 영어이름을 쓰도록 했다고 한다. 효과가 있었냐 물으니 그냥 경어쓰는것 보다 훨씬 불편했다고 한다. 그 선배의 이름은 뭐냐고 그 날 내내 물어봤지만 절대 말해주진 않았다.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이 영어이름에 대한 고민이 많다. (나만 많은 걸 수도 있다) 특히나 본인의 이름이 미국인들한테 불리기 정말 어렵거나 난감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더욱 더 영어이름을 어떻게 해야하나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를들어, 정아 -> Jungah 여서 높은확률로 준가로 불릴 것이다, 석길 -> Suck Kill 처럼 들려서 외국인들 입장에선 감히 사람의 이름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이름이다) 

내 주변의 대학원 유학을 온 한국인들의 경우 대략 6:4의 비율로 영어이름을 갖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나도 영어이름을 따로 짓지는 않았고, 한쥐도 따로 영어이름이 없다. 한쥐의 한글이름은 이미 미국인들도 너무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이름이라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부럽ㅠ) 그러나 내 이름은 쉽게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라서 항상 누군가를 만나서 날 소개할 때 좀 어색하다. (상대방도 내이름을 최대한 부르기 꺼려하는 느낌이 든다.) 영어이름을 하나 만들까도 생각해봤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쉽지 않음을 느끼고 현재는 반 정도 포기한 상태이다. 그 이유를 좀 소개해보겠다.

  • 너무 늦었다.

이 고민을 유학오기 전에 했더라면 난 괜찮은 영어이름을 하나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었다. 어느 날 내가 학교에 가서 만난 친구들에게 “이전까지의 이름은 잊고 날 이제부터 마이크라고 불러!” 라고 하기 좀 민망하다. 이미 그들은 연습을 통해 내 이름을 얼추 자연스럽게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바꿔서 부르라고 하는게 좀 이상하다 생각이 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내이름은 ㅁㅁ인데 발음하기 어려워서 그냥 편하게 OO라고 불러줘” 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새로만난 사람들에게 OO이란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면 되지 않냐!” 라고 할 수 있다. 나도 해 봤다. 그러나 여기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 ? 아  나 부른거야?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는 아마 한국인이라면 다 알 것이다. 모든 것은 이름을 가졌을 때 비로소 인식되어진다는 메세지를 전하는 시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쥐의 지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내 영어이름으로 날 소개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들과 자주만나진 않았지만 종종 만나서 대화하다보면, 나를 부를 때 내가 날 부른 줄 못 알아챌때가 많다. 순간적으로 저 이름이 내 이름이라는 걸 까먹는다. 익숙하지 않아서. 익숙하게 하기 위해선 나를 맨날 보는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불러줘야 하는데 그건 이미 위의 이유로 어렵다. 진퇴양난이라고 할 수 있다…

  • 영어이름을 그럼 아예 사용 안 하나?

많은 한국인이 영어이름 혹은 닉네임을 사용하게 되는 때가 공통적으로 있다. 바로 스타벅스 주문할때다. 미국에선 한국과 다르게 주문번호로 불러주는 경우보단 주문을 할 때 이름을 물어보고 메뉴가 나왔을 때 그 이름을 불러준다. 그 순간 만큼은 자주쓰는 영어이름, 혹은 그냥 멀리서 들었을 때도 잘들리는 그런 이름을 아무거나 알려주면 편하다. 시끄러운 매장에서 이름이 잘 들리기 위해 나는 파열음이 들어간 이름을 종종 사용한다. ‘패트릭, 토미, 카일’ 등등 별다르게 생각해놓은 이름있으면 이 이름들을 한번 써 보면 좋을 것 이다. 

나는 영어이름을 쓰는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름이란게 결국 남들이 부르기 위해 존재하는 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르기 힘든 이름이면 굳이 그 이름을 고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 아빠는 오래전부터 사용한 영어이름을 아주 잘 사용하고 있고 시민권 신청할 때 이름을 바꿔서 현재는 First name이 미국이름, Middle name 이 한국이름이다. 현재는 아주 만족하게 지내고 계신다. 편하게 모든 사람들이 쉽게 기억하는 미국식 이름 사용하는 것도 미국생활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한국이름을 고수하는게 정체성과 아주 연관이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이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민 1세대 한국인 부모들이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영어식으로 지어야할지 한국식으로 지어야할지 고민이 많이 된다고 한다. 참 쉽지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익숙한 영어이름이 있다면, 영어이름 쓰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래 영어이름을 쓰는 사람도 아닌데 이 미국 사회에 맞춰나가기 위해 억지로 영어이름을 쓰는 것은 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 요즘엔 많은 미국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 고유의 문화를 존중하며 원래의 이름을 최대한 비슷하게 불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