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 생일이었다. 일 년마다 돌아오는 생일, 원래부터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래도 매 년 한쥐가 챙겨줘서 재밌는 시간을 보내왔다. 올해 역시 살면서 처음으로 ‘호캉스’ 라는 걸 다녀왔다.(아주 굿)
생일이 예로부터 계속 사람들에게 중요시 여겨졌던 이유는 바로 ‘나이’의 증가 때문이다. 올해로 나는 29살이 되었고, 지금부터 살아가는 모든 하루하루는 나의 20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30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간일 것이다. 29살이라는 나이가 아직은 낯선 지금, ‘나이’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뀌게 되었던 경험을 나눠보려고 한다.
2019년 2학기 당시 난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졸업을 하고 난 미국에 ‘가야했다’. 그 때의 난 미국에 가는 것이 정말 싫었다. 왜냐하면 미국행이 내 입장에선 굉장히 갑작스럽게 정해진 것이고, 난 마음의 준비, 진로문제 등등 어떤것도 미국행에 대비해 제대로 준비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었던 인생 계획을 완전히 바꿔야만 했다.
처음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걸 알게된 건 2016년이었다. 그 때부터 막연히 ‘미국가면 대학원 가야겠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는 아니고, 그렇다고 또 안하는건 아닌, 그런 미온적인 자세로 유학을 준비했었다. 이런 애매모호한 태도로 살아오다가 이번 학기가 끝나면 난 내 고향 한국과는 이별해야하는 상황이 오니, 갑자기 무서워졌다.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지?’, ‘나 영어도 잘 못하는데…’, ‘음식 주문도 잘 못하겠던데 무슨 일을 하고 뭐 먹고 살지…’
하는 생각이 내 가슴을 조여왔다.
‘이대로 가면 X 된다.’ 9월 어느 날 수업을 듣던 중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다. 그 길로 나는 지체없이 중도휴학 신청을 했다. 당시 4학년 2학기 전공필수과목이 가을학기에만 열려서 지금 휴학하는 것은 졸업을 한 학기가 아닌 1년을 늦추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그건 나한테 중요한 일이 아니였다. 친구들은 내 휴학소식을 나중에 듣고 말했다.
“야, 1년동안 뭐하려고? 계획도 없이 갑자기 휴학하는건 너무 위험한거 아니야?”
“이미 XXX는 석사졸업하고 취직도 했고, YYY는 군대 안가고 바로 석박통합전형으로 대학원가서 곧 벌써 3년차인데 뭐 계획해놓은 건 있어?”
다 맞는말이다. XXX, YYY는 모두 다 내 대학동기들이었고, 난 계획도 없이 졸업을 1년이나 늦췄고, 친구들이 한 발짝 앞으로 갈 때 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앞이 낭떠러지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갈 수 없었다.
휴학은 했지만 뭘 할지는 계획하지 않았다. 뭘 할까 고민 하던중에 ‘어떤 걸 하던 일단 부모님집에서 잠시 쉬다오자’ 라고 생각해서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2016년 부터 미국에서 살고있었다.)
부모님 집에 도착 후, 마음을 정리하며 (빈둥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근처 대학교 ESL (English Second Language) 클래스를 듣기로 했다. 이 클래스는 각국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러 오는 곳이다. 레벨테스트를 받은 후 레벨에 맞는 반을 배정받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과 친해지면서 그들과 대화할 일이 많았다. 대화를 하다보니, 세상은 정말 넓고,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정말 좁았던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수업을 듣긴 하지만, 별다른 이벤트 없이 사실상 놀기만 하는 나날이 몇 달간 이어졌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이랑 같이 밥을 먹거나 혼자 근처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사실상 돈만쓰고 백수생활을 하고있었는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전까지는 항상 몸이 편하면 ‘내가 너무 시간을 죽이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고, 마음이 편하려면 열심히 바쁘게 살아야하고,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선 놀고 먹고 자기만 하고, 내 커리어 개발에 도움이 되는 일을 전혀 하고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하지않고 여유로웠다. 한 동안 원인불명의 그 여유를 즐겼다.
어느 날 은행일을 보기위해 갔던 은행에서 직원과 상담을 받던 중, 나이에 따라 혜택이 다를 수 있다는 얘길 해주면서 나에게 몇 살인지를 물었다. 순간 내 나이가 몇인지를 잊어먹고, 머리속에서 계산을 해야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이를 잊고 살고있었다. 그리고 그 잊고살았던 ‘나이’가 내 마음의 불안, 걱정의 씨앗이라는걸 깨달았다.
한국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 중에 ‘내 나이가 xx인데, ~~’라고 시작하는 문장이 있다. 유머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고, 진지하게 쓰일수도 있다. 근데 진지한 의미를 갖는 경우보다는 그냥 ‘버릇’처럼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표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서 나 스스로에게 어떤 불가항력의 제약을 걸거나 압박을 하게된다. 이 제약과 압박이 불안감을 더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살면 상대방의 나이를 잘 묻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를 묻는 게 조금 이상하고 무례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내 나이를 묻지않고, 나도 나이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져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날 감싸고있던 어떤 제약과 압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때까지 연령별 이뤄내야만 하는 숙제에서 벗어나 내 속도에 맞춰서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었다. 모든 계획에서 ‘나이’라는 변수를 빼고 생각하니, 불안이 사라지고 차분하게 내가 뭘 원하고 어떤 삶을 살고싶은지를 고민 할 수 있었다. 그러고나니 미국에 오게 된 것이 좋은 기회라고 느껴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지금도 내 주변 박사과정 동기들, 선배, 후배들 다 나이를 모른다. 이미 자녀가있는 사람들도 많고,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도 있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신의 경력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가치관에 대해서는 편하게 얘기하지만 그들의 나이에 대해선 얘기하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24살에 1억을 모은 사람도 있고, 40살에 본격적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속도로 설계해 나갈때 행복해 질 수 있다.
한국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손꼽히게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낀다고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 원인중 하나로 ‘비교하는 문화’를 얘기한다. 나도 매우 동의하고 이전 행복한 대학원생 이란 포스팅에서도 말했다. 하나 덧붙이자면, 나는 이 비교의 기저에는 ‘나이’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돈이 많든 적든, 남자이건 여자이건, 배경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 공평하게 나이를 먹고 있으니, 핑계를 댈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더 ‘나이’에 따라서 나뉜 사람들의 사회적 평균 위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너가 게을러서’ 혹은 ‘너가 노력을 더하지 않아서’ 라고 비난하거나, ‘저런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라고 동정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러한 비난 혹은 동정이 더 사람들로 하여금 조급함을 느끼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형,누나,오빠,언니 등의 호칭을 정해야 하는 한국문화 특성상, 우리는 항상 자신의 나이와 상대방의 나이를 인식할 수 밖에 없다. 나이는 그저 호칭정리 할 때만 사용하고, 나이에 상관 없이 인생을 내가 주도하면서, 동년배들과 비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