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학회란 약간 일 년의 숙제다. 학회에 발표할 거리가 있다는 것은 내가 그 동안 뭔가 연구를 해왔단 것의 반증이 되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학회를 위해서 연구하는 느낌이있있다. 우리 연구실에서 지금까지 주로 가는 학회는 AIChE (미국 화학공학회, 에이키) 로 매년 11월쯔음 열린다. 초록 제출 마감기한은 4-5월쯤으로 학회를 다녀오면 다음 해 초록으로 뭘 내야하나, 고민하고 실험하면서 6개월을 보내고, 어느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면 그걸로 초록을 제출, 학회 기간동안 내용을 가다듬고 실험을 진행한다. 이 사이클을 몇번만 반복하면서 몇년이 훌쩍 지나갔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과 특성에선, (특히나 시뮬레이션 말고 실험을 하는 랩) 매년 새로운 내용으로 학회에 가는게 개인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실험도 해야하지만 어느정도 운의 영역도 있어야 하는 것…같기도 하는데 지극히 내 생각이다ㅎㅎ

암튼 2021년에 박사과정 시작하면서 2022, 2023년 모두 AIChE 를 다녀왔는데 올해는 못가게 되었다. 발표할 내용이 없는 건 아니다. 새로운 실험이 어느정도 진행이 되어서 충분히 발표할 만한 스토리를 완성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있나. 바로 자본주의 세상이다. 숨쉬는 것 마저 돈이 나가는 마당에 학회 참석도 공짜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이번 AIChE 장소는 San Diego, CA다. 아무래도 동부 플로리다에서 가기엔 비행기 값이 많이 들 예정이고, 교수님이 세 명의 학생 모두 서포트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셔서, 우리 랩 제일 왕고 한명만 가고 투고 (나) 와 쓰리고 는 못 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럼 올해 아무것도 안하냐! 또 운이 좋게도 그렇진 않다. Society for Biomaterials (이하, SFB) 동남부지역 심포지엄이 아틀란타 조지아텍에서 개최되었다. 나와 쓰리고 모두 작년 과내에서 하는 작은 심포지엄에서 수상을 해서 $300 정도의 Travel Fund를 받아놓은게 있어서 교수님이 그걸 사용해서 다녀오자고 했다. 날짜는 9/19-9/20 이틀이였다.

  • 출발 전 준비

효율적으로 다녀오기 위해 우리랩 말고도 B랩 과 C랩 의 교수님과 학생들도 다같이 가기로했다. 밴을 하나 빌린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이 가는 인원이 너무 많다.

우리랩 – 나와 쓰리고 (2명)

B랩 – 교수, 학생 3명 (4명)

C랩 – 교수, 학생 3명 (4명)

총 열명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10명이 한번에 탈 수 있다면(거기에 각자 짐도 가방 한 개씩 있다고 하면) 그건 밴이라고 부를 수 없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틀란타까지는 대략 5시간 정도 걸리는데 ‘좁은 밴에 다닥다닥 앉아서 캐리어를 무릎위에 놓고 가야하나’ 라는 생각이 출발 전 부터 우리를 걱정시켰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길 수 있는 질문! 

‘각자 차도 있고 다 어른들인데 왜 자차를 이용 안하고 그렇게 가나?’

답은 역시 돈이다.ㅎ…자차를 이용하면 내 기억상 마일당 0.5-0.8 달러정도의 금액을 지원해줘야 하는 그런게 있는것 같다. 그럼 아틀란타까지 왕복거리가 대충 650 마일이라 계산하면 이 금액만 $325 에서 $520 이다. 그러나 단체로 밴을 빌리고 N 빵을 하면 $70 정도에 퉁칠 수 있었따. 그러니 내가 만약 자차를 이용하겠다 하면 할 수 있지만 아마 지원을 해주시진 않을 거기 때문에 난 그냥 순응하기로했다. (힘들게 가는 것도 싫지만 학회 가는데 내 돈 쓰는 건 더 싫다ㅎ) 학회는 목,금 이틀이었고 스케줄은

수요일 점심쯤 출발 – 수요일 저녁 도착

목요일 학회

금요일 학회 -오후 6시쯤 끝나고 그날 출발 플로리다에는 밤 12시쯤 도착

이렇게 됐다.

  • 수요일 (9/18)

수요일 날 B랩의 학생 L이 소심한 반기를 들었다. 이 학생의 고향이 테네시인데 자기가 학회를 끝나고 테네시에 좀 다녀올 수 있게 자기차를 이용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B랩 교수님은 자차 이용을 허락해주었고 (비용을 지불해 준다는 뜻) L은 자기차로 자기 랩 학생 E와 나와 쓰리고도 같이 태워주기로 했다. 물론 테네시 집에 방문한다는 건 뻥이다. 하지만 이 글을 B 랩 교수가 읽을 가능성이 없기때문에 편하게 말할 수 있다ㅎ 아무튼 그렇게 L의 차에 타서 좀 쾌적한 환경에서 아틀란타 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가는길에 들린 미국인들이 정말 좋아하는 Buc-ee (벜-이). 큰 휴게소 같은 곳인데 솔직히 내가 보기엔 그냥 깔끔한 휴게소에 귀여운 비버정도 있는것이 다다. 이거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녀석들 내린천 휴게소 한번 오면 혼절하겠군' 싶었다.
하지만 많이 귀엽죠? 하마터면 살 뻔했죠?
힘들게 도착 한 조지아텍, 호텔 체크인을 하고 가볍게 내일 학회가 있을 장소를 구경가기로 했다.
대도시 바로 옆에 이렇게 캠퍼스가 있는게 신기했다. 게인즈빌에선 볼 수 없는 고층빌딩...

간략히 학교 투어를 하고 수요일은 호텔에서 쉬었다.

  • 목요일 (9/19)

학회 일정을 보면 아침 7시반 부터 8시 반까지 등록 및 아침식사라고 되어 있었다. 뭐 호텔에서 그렇게 꿀잠을 자는 편도 아니고 해서 알람을 일찍 맞추고 대충 8시 전까지 가는 걸로 계획을 짰다.

거의 1등으로 도착한 우리는 등록을 하고 아침식사를 먹었다. 이번 학회에선 목요일 아침 점심 저녁, 금요일 아침, 점심 총 이렇게 다섯 끼를 챙겨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별로 먹고싶은게 없었다. 그래서 고른 더블 머핀..

이 학회는 규모가 크지 않은 학회라 한 세션밖에 진행되지 않았다. 즉 대략 100명정도의 참여자가 전부 다 한 발표를 듣는 것이다. 아무래도 학회 토픽이 biomaterials 이다 보니 나와 쓰리고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in vivo (생체 실험, 세포실험, 동물실험같은 것을 의미) 결과를 많이 말했다. 하루종일 제일 많이 들은 건 1형 당뇨와 각종 다양한 암들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의학 혹은 병명 같은 것들을 영어로 많이 사용해본적이 없어서 발표할 때 마다 노트북으로 저 병명이 뭘 의미하는지 찾아보고 그랬다. 한국말로 번역해도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질병들의 치료방법을 제시하는 발표를 듣고 있으니 중간중간 정신을 놓을 뻔한 위기를 여러번 맞이했다.

이 학회의 또 다른 안 좋았던 점은 바로 서투른 운영방식이었다. 학회 시작 전부터 이메일로 자꾸 변경사항이 오는 것 부터 시작해서 포스터 발표를 점식식사와 동시간대에 진행해서 발표자들은 밥을 입으로 먹으라는 건지 코로 먹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느낌의 운영으로 화룡정점을 찍었다. 나의 포스터 발표는 목요일이었고 12시 20분부터 1시 20분까지였다. 앞 세션이 애초에 12시 30분쯤에 끝났는데 점심 케이터링도 한 곳 밖에 없어서 100명되는 사람이 한 곳에서 줄을 쫙 섰다. 이거 다 기다리고 먹으면 난 내 포스터 앞에도 못 서보고 끝날 거 같은 생각에 난 과감히 점심을 스킾하고 내 포스터 앞으로갔다.

포스터발표의 가장 어려운 점은 ‘뻘쭘함’인 것 같다. 지금까진 포스터발표를 주로 과 내에서 하는 조그만 심포지엄에서 밖에 안하고 큰 학회에선 항상 오랄 프레젠테이션만 했다. 뻘쭘함을 없애기 위해 나는 지금껏 신촌역 빨간 거울 앞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신천지와 폰팔이들의 모습을 모방하기로 했다. 지나가던 사람 붙잡고 무작정 인사하고 ‘필름 새로 갈아드릴까요?, 저 발표 수업있는데 연습하는거 도와주실래요? 그림 심리테스트 한번 해보실래요?’ 말을 걸면 그들도 거절하기 미안해서 내 포스터 구경을 하거나 내 설명을 들어준다. 그렇게 줄이 어느정도 줄어들 때까지 지나가는 사람에게 내 연구를 강매한 후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어-색

어찌저찌 포스터 발표가 끝났다.

그 후 플로리다에서 알던 친구랑 연락이 닿아서 잠깐 땡땡이 치기로 했다. 이 친구는 플로리다에서 졸업 후에 조지아텍 박사과정에 합격해서 지금 학교에서 연구하고 있다.

친구가 데려가준 조지아텍 명물 파란 당나귀
너무나 익숙한 파랑과 주황...
시그니처 메뉴라고 사준 465, 포 식스티파이브 라고 읽는거 같다. 맛은 약간 달다구리 맥심커피 맛이다.

그렇게 친구랑 오랜만에 수다 좀 떨었다. 내가 게인즈빌에 온 후 1년뒤에 졸업해서 떠난 친구인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뭔가 반갑고 신기했다. 그렇게 1시간 가량 얘기를 하다가 이제 땡땡이 친게 눈치보여서 다음을 기약하고 다시 학회장으로 돌아갔다.

남은 일정은 계속 발표를 듣고 마지막에 리셉션가서 식사를 했다. 뭔가 하루종일 발표를 듣고 해서 저녁도 후다닥 먹고 우리는 호텔로 금방 돌아갔다.

  • 금요일 (9/20)

어제는 발표를 했고, 오늘은 발표도 없다. 오늘도 계속 발표 듣기만 해야하나..싶으면서 어떤내용의 발표가 있나 초록을 좀 살펴봤는데 역시나 각종 처음들어보는 질병들의 해결책과 1형당뇨였다.ㅋㅋ 막막해 있던 찰나에 나랑 같이온 우리랩 쓰리고가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듯 나한테 자기는 오늘 네트워킹을 많이 하는게 목표라고 말했다. 사실 네트워킹은 학회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정말 나한텐 어렵다.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라고 해야할까. 한국말로도 모르는 사람한테 말걸고 스몰톡 하는것이 어려운데 영어로 하려니 참 더 쭈뼛쭈뼛하게 된다.

아무튼 나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이 있던 도중 쓰리고가 나에게 ‘저기 줄리교수님 랩 학생이다! 쟤한테 인사하자!’ 라고 했다.

여기서 간략히 줄리 교수님을 소개하자면, 내 지도교수님의 포닥시절 지도교수님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고있는 연구분야도 줄리교수님 랩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아직도 진행중이라서 굉장히 긴밀하게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있는 랩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줄리 교수님 학생들과 인사를 하고 그들이 랩 투어도 시켜줘서 랩 구경도 하고 그들의 포스터 앞에도 가서 많은 디스커션도 했다. 사진도 찍고 링크드인 친추도 하고나니 뭔가 그래도 여기와서 얻어가는 건 하나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오전-점심까지 이어진 네트워킹이후 나랑 쓰리고는 너무 지치고 똑같은 발표내용에 지겨워서 땡땡이를 치기로했다. 내가 어제 갔던 곳에 가서 좀 쉬자고 했고 우린 그렇게 그곳에 가서 한 2-3시간을 수다를 떨었다. 이 친구는 인도인인데 학과내에서 인도인들이 굉장히 많고 그들끼리 좀 끈끈하게 뭉쳐다니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꼴뵈기 싫거나 그런건 없다. 난 이상하게 인도인 친구들이 더 정서에 잘 맞는거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인도인 커뮤니티는 알고있는 정보도 많고 찌라시도 많이 돌아서 2-3시간을 과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사고에 대해서 듣는데 재밌었다. 슈카월드 화공과 편을 듣는 느낌이랄까.ㅋㅋ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과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들을 듣다보니 돌아가야할 시간이 금방 왔다.

5시 반부터 RAPID FIRE talk 이라고 원래 안내되어 있기에는 포스터발표 중 잘하는 애들을 선별해서 3분짜리 발표를 한다고 했다. 근데 왠걸, 이미 학회 전 날 저 발표를 할 사람들을 다 정해놨다고 한다. 그럼 포스터 평가는 안하는건가 싶었다. RAPID FIRE talk 발표자에는나랑 같이 방을 썼던 B랩의 S군도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것까지 다 지켜봐야했다. 심지어 같은 학회를 온 다른 과 한국인 형도 저기서 발표를 했다. 그냥 초록만 읽어보고 뽑았나 싶어서 이럴거면 왜 평가한다고 해놨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발표가 진행되는 중에 나는 이제 곧 5시간의 이동을 해야하는 시간이 다가오기에 편한 신발과 바지로 갈아입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주섬주섬 가방에서 준비한 슬리퍼로 갈아신으려고 하던 중에 내 옆에 앉아있던 쓰리고가

‘갈아신지 않는게 좋을 거야.’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소코마테다

내가 느끼기엔 이런느낌이었다. 당황한 나는 ‘??왜??’ 라고 되물었고 그 친구는

‘너 곧 상 받는데 슬리퍼 신고가면 좀 쪽팔릴걸’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어제 점심도 스킾하고 포스터앞에 섰을때 여유롭게 밥을 먹으며 나에게 다가와 내 포스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던 그분은 평가해주시는 교수님이었고 밥도 스킾하고 포스터 앞에선 나의 열정에 감복하셨는지 상을 주셨다.

짝짝짝

전말을 이랬다. RAPID FIRE talk  시작하기 전에 쓰리고가 B 랩 교수가 나눈 대화다.

쓰리고: 우리 언제 출발 함?

B랩 교수: 클로징 세레모니까지 다 하고 가야돼, 용쥐 상받음

쓰리고: 헉! (비밀로 해야겠다ㅎㅎ)

이렇게 된 것이다.

슬리퍼에 넣었던 발을 다시 빼서 구두로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상을 받았다. 뭐라도 건져간 게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한 학회였다.

돌아가는 길엔 몇몇 애들이 아틀란타 주말 여행을 하고 돌아가는 애들도 있고 다른 이런저런이유로 빠지는 사람들이 생겨서 아주 널널하게 차에 타서 올 수 있었다.

가는 길 역시나 또-이

교수님의 엄청난 운전 실력으로 7시 넘어서 출발했고 휴게소 한번 들렸는데도 12시에 도착했다. 난 뒷자리에서 내내 자고있어서 몰랐는데 엄청 밟으신 것 같다. 그렇게 학회는 마무리 됐다.

P.S. 다른과 한국인 형네 연구실은 4명 전원 비행기 끊어줬다고 한다. 역시 머슴일도 대감집에서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