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괜찮을까?
나는 2021년 9월 미국의 한 공과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박사과정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체감상 그리고 동료 학생들을 보았을 때 나는 현재 중간지점쯤 와 있는 것 같다.
흔히들 많이하는 중간 점검이란 걸 해보려 한다.
수업 성적: 3.55/4.0
논문: 리뷰논문 3편, 연구논문 1편, 북 챕터 1편
학회참석: 국제학회 2회
연구 진행사항: 2 번째 연구논문 제출 후 심사 대기중, 3 번째 프로젝트 30%정도 완성
인간관계: 만족
기타 취미활동 및 여가생활: 만족
종합평가: 4/5
리뷰논문이 3편인거에 비해 연구논문이 아직 1편인게 조금 아쉽다. 제출한 논문은 부디 무탈하게 억셉되었으면 한다. 불어났던 체중도 다시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오고 있고, 한쥐랑 구름이와 같이 지내는 삶 역시 행복하다.
한국 혹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물론 전부 다 한국인) 친구들이 많이들 얘기하는 게 있다. ‘진짜 힘들다. 힘들지만 꿈을 위해 버틴다.’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가는 곳 대학원’ ‘넌 대학원 절대 오지마라’ ‘박사과정 학생은 교수의 노예다’
이 말들은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돌아다니는 얘기다. 실제로 대학원에 간 많은 선배들의 힘들어하는 모습이 쉽게 목격되고 그들의 증언은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나는 겁을 먹은채로 대학원에 입학했고 지금 3년 정도를 보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한 내 만족도가 꽤나 높다. 왜 나는 만족하는 걸까. 내가 연구에 적성이 맞는건가? 내 정신력이 남들보다 더 튼튼해서 이정도 고난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끼는건가?
친구들이 힘듦을 토로하면서 나에게 너는 어떠냐고 물을 때마다 사실대로 대답하기 민망한게 있어서 그냥 ‘나도 똑같이 힘들지’ 하고 넘어가긴 하지만, 솔직히 괜찮다. 그래서 더 내가 열심히 안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박사과정이라는건 힘들기 마련이고 실제로 실험, 발표와 논문작성에 치이다보면 지치고 스트레스 받는일이 굉장히 많이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이란건 힘들기 마련이다. 병원에서 일을 하는 의사인 친구, 회계법인에서 야근에 시달리는 친구, 안정적인 공기업에 근무하는 친구, 누구나 아는 대형 증권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모두 다 자신의 직장생활이 고되고 힘들다. 그들과 비교해서 대학원이라고 딱히 특출나게 더 힘든건 아닌것 같다.
한국에서 대학원의 악명이 높은건 (물론 미국도 악명높다, 각종 다양한 밈들에서 대학원생은 최하계급으로 분류된다) 남과의 비교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남자라면 대부분 이십대 후반 혹은 삼십대 초반이다. 친구들 중 직장에 일찍 간 사람은 벌써 몇 년을 일해서 연봉도 높고 모아놓은 자산도 꽤 될 것이다. 그에 반해 대학원생은 모아놓은 자산은 커녕 어쩌면 아직도 부모님에게 일정부분 손을 벌리고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그렇게 대학원의 악명이 높은 것 같다. 내 상황만 놓고보면 꿈을 위해 혹은 좋아하는 연구를 위해 더 시간을 쏟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을 수 있는데, 가까이 지내는 친구의 어른스러운 삶(차 구매, 가격이 나가는 데이트 등등)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만족을 하는가? 당연하게도 비교할 대상이 없다. 지금 창창하게 본인의 커리어를 다져나가고 있는 내 친구들과는 물리적으로 수천 키로미터 떨어져있고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대학교 하나가 메인인 컬리지 타운이기 때문에 거주민 대부분이 학생 혹은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즉 눈감고 귀막으면서 살면서 나한테 보이는 것만 보면서 산다. SNS로 보이는 친구들의 삶과 나를 아예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다. (왜? 쟤넨 한국 난 미국에 있으니까, 일종의 정신승리)
미국대학원은 생활비를 준다. 물론 지역 물가에 맞춰서 겨우 먹고살만한 수준이긴 하지만 사치를 딱히 부리지 않는 내겐 적당하다. 심지어 한쥐도 같은 박사과정 학생이기 때문에 남들에 비하면 소득이 두배라고도 할 수 있다. 사치만 부리지 않는다면 먹고싶은거 먹고, 가고싶은데 갈 수 있는 경제적 능력 또한 만족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대단해서,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서 대학원생활을 만족하고 있는게 아니였다. 그저 운 좋게 다른 대학원생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기 때문에 만족할 수 있었던 거였다.
오늘도 나는 내일 있을 실험을 어떻게 잘 끝내고 이걸 토대로 연구를 어떻게 발전시킬까 생각하며 잠들겠지만, 고개를 돌리면 있는 내 가족들과 먹고싶은 걸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소득에 한번 더 감사해야겠다. 이것이 없었다면 나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주위 사람들에게 절대 대학원은 가지말라고 말하고 다녔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