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해있는 우리 과에서는 박사자격시험 (통칭 퀄 시험) 을 통과한 학생은  한 학기 Supervised Teaching 코스를 의무로 들어야 한다.

Supervised Teaching (ST) 는 말 그대로 내가 담당 교수님의 감독하에 한 과목을 배정받아 학생을 가르쳐보는 과정이다. 독립된 연구자인 박사학위를 얻기위해선멘토링 경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아마 미국 대부분의 학교 대부분의 전공에서 설치하는 과정이다. 한국에서 많이 들어본 Teaching Assistant (TA)랑 어느정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 설렘과 긴장감을 가득 안고 지냈던 지난 가을학기 (23 Fall) ST 수업에 대해서 좀 얘기해보려고 한다.

– 무슨 과목을 하지? (부제: 어떤 교수님 밑에서 하지?)

가을학기 시작 전 여름에 나와 같이 퀄을 통과한 동기들에게 과에서 전체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는 다음 가을학기와 봄학기에 우리과에서 열리는 수업들과 담당교수 리스트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가 해야할 건 그 엑셀 파일에다가 우리의 선호도를 1부터 5 스케일로 (1= 이 과목은 좀 하기 싫다, 5= 이 과목은 정말 하고 싶다) 적어서 제출하는 것이다. 이런 선호도 조사를 할 때 내가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미국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게 아니구나’ 이다. 이게 무슨말이냐면, 소위 ‘꿀’ 교수 혹은 ‘꿀’ 수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선배들 그리고 동기들 사이에서 활발한 대화가 오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치만 항상 이런 논의의 끝은 ‘결국 꿀수업 꿀교수는 너가 하기에 달려있으니, 너가 하고싶은 과목과 교수님을 골라라’ 로 끝나긴 한다. (뭔가 싱겁…)

과목리스트를 자세히 보면서 나는 하나의 기준을 정했다.

‘내가 못할 과목들만 1주고 나머지는 4에서 5로 가자’

내가 못할 과목들이 무엇인가 하면 대부분 컴퓨터 코딩 관련 수업들이다. 그렇다 난 컴퓨터 코딩 이런 것만 봐도 숨이 탁 막힌다. 처음 배우는 학부생들에게 가르쳐주는 수준의 파이썬은 그래도 어지저찌 해나갈 수 있겠지만 자신있는 부분은 아니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배제했다.

거기에 대학원 수업도 자신이 없었다. 내가 박사 1년차 때 들었던 수업의 ST인데 솔직히 그때도 어거지로 간신히 버티기만 했을 뿐, 새로 들어온 후배들을 가르쳐줄 자신은 없다. (심지어 그 과목의 ST는 그 과목을 수강했을 때 A를 받은 학생들만 가능했기에 나는 애초에 자격 조차 안됐다 ^ㅇ^)

그럼 남은게 뭐였나 하면 사실상 우리과에서 배우는 대다수의 코어 과목이다. 난 어차피 나만 잘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4-5점을 표시하고 파일 제출 후 ‘Chemical Kinetics and Reactor Design’ 이라는 과목의 ST를 맡게 되었다. 담당 교수님은 내가 1년차 때 들었던 수업의 교수님이셨지만 그 이후로는 큰 교류가 없는 그런 어색한 사이의 교수님이었다.

–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앞서 말했듯 ST는 교수의 감독하에 학부생들을 지도해보는 경험을 가져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대학원생도 그래봤자 학부 때 이 수업 한 두 학기 들어본 게 전부인 학생일텐데 교수가 뭘 믿고 수업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나도 학부 때 들어본 반응공학 한 학기 들었었고, 대학원 와서 조금 심화버전의 반응공학 및 반응속도론을 들었지만 학부생들 앞에서 수업을 처음부터 진행할 자신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교수님은 그저 내게 매 주 1회 오피스아워 + 시험 전 시험범위 리뷰 세션 진행 (총 세 번) + 채점 및 보드마카 셔틀 정도가 다였다. 딱히 어려울게 전혀 없고 업무 강도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의 ST 였다.

– 매 주 반복된 오피스 아워, 얼굴 본 친구는 5명?!

매 주 진행한 오피스 아워는 사실 오피스 아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왜냐하면 전체 60명이 넘는 수강생에 비해 한 두명 오면 많이오는 날이었고 아무도 안오는 날도 허다했다. 교수님도 나와 다른 시간에 매주 오피스 아워를 진행하셨는데 교수님의 오피스 아워에도 학생들이 방문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 이나 미국이나 오피스아워 잘 안찾아가는건 비슷한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꽤 열심히 거의 매주 찾아왔던 아이가 있다. 아주 똘똘하고 열의가 넘치는 학생이었다. 질문하는 것 역시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해보고 질문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나는 질문이었고, 당연히 그 친구의 성적은 거의 매 시험 다섯손가락안에 들었다. 어느 나라, 어느 학교에서나 교수님 혹은 조교님과 자주 교류하는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는건 당연한 것 같다.

– 시험 문제를 만들라고요?

1차 시험 전에 교수님이 나에게 제안해 주신 것이었다. 한 번 시험문제를 만들어 보라는 것. 화학반응속도론에 관한 문제를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사실 이 화학반응속도론 시험문제를 고민할 때 내 머리속에 떠오른건 수능시험에서 봤던 화학2 과목 시험문제들이었다. 몇 개의 관련된 문제들을 보고 좀 짜집기해서 하나의 문제를 완성해 갔는데 교수님이 괜찮아 하시고 실제 시험에 출제하셨다.

그러나 큰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솔직히 이 문제는 공짜로 주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근데 생각보다 이 문제를 학생들이 많이 틀렸다.

이 글을 읽는 사람중 화학공학을 전공했거나 수능 선택과목중에 화학2를 선택했던 사람이라면 무리없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신기하면서도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다. 

‘으휴, 이것도 못푸냐’

하는 안타까운 감정이 아니다.

저 문제의 핵심은 이 반응물 A가 분해되어서 B와 C가 생성되는 화학반응의 차수가 1차 이냐 2차이냐 를 아는 것이다. 방심하고 문제를 푼다면 1차 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시된 표에 반응물 농도와 반응속도를 보면 2차 반응이란걸 알 수 있다.

지금 이 포스팅에서 저 문제를 해설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여기서 하고싶은 말은 한국과 미국의 다른 시험문제 스타일이다.

한국에선 소위 함정문제, 즉 문제 지문 사이에 학생들이 헷갈릴만한 함정들을 곳곳에 설치해 놓고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문제들을 많이 출제하고 심지어 그런 문제를 ‘킬러 문항’ 이라고 한다. 애초에 이름부터가 킬러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수단의 일부인 시험 문제가 오히려 학생들을 함정으로 유인하고 위협한다.

나는 굉장히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고, 저런 킬러문제가 날뛰는 살벌한 사교육(전쟁)판을 나름 정면돌파해 온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느낀 안타까운 감정은 한국 교육과정을 거친 우리에게 저런 함정문제는 시험마다 항상 있어와서 익숙하게 느끼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심지어 함정에 걸리더라도 ‘아이고 문제를 똑바로 읽지않은 내가 잘못한거구나’ 하고 자책한다. 시험이 그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저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고 이미 그 부분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한국 학생들이 (나 포함) 안타까웠다.

내가 낸 문제는 1번 문제였고 교수님이 출제한 2,3번 문제는 저작권 때문에 업로드 하지 못하지만, 마치 퍼즐 조각들을 학생들에게 주고 ‘배운것들을 통해서 한번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보렴’ 이런 느낌의 문제들이었다. 그에 반해 나의 문제는 ‘이 퍼즐조각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자세히보면 다르게생긴 조각을 하나 더 넣어놨지, 이걸 잘 구분해서 그림을 완성하렴’ 스타일의 문제인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사실 많이 부끄러웠다. 

미국 학생들도 내가 아는 한국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놀기 좋아했고, 공부하기 싫어했다. 시험공부는 벼락치기로 했고 중간고사 이후부턴 손 놓은 학생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러나 어딘가에 있어서 더 자신 있어보였고 자존감 있어보였다. 100점 중 60점을 맞으면 40점을 잃었다는 것보다 60점 얻었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고, 내 친구가 나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 것에 억울해하지 않아 보였다.

한국에 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미국 학생들은 대학 가기 전까지는 한국 학생들보다 학업성취도가 낮은데, 대학 이후에는 한국 학생들보다 성취도가 높아지게된다.’

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 다만 이번 ST 경험을 통해 미국 학부생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관찰해봤고, 어떤 시스템으로 이 학생들이 그 동안 공부해왔고, 평가받아 왔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저 문장에 내가 동의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근거로 나온 말인지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내 머리속에 경종을 울리게 해주는 ST 시간이었다. 배우는 것이 뭔지, 배워서 어떻게 활용할건지, 배운 것을 어떻게 평가할건지 등등 이전까지의 내가 교육에 대해 생각해오던 것을 통째로 뒤집어서 바닥에 전부 펼쳐 놓은 후 꼭 필요한 조각들만 다시 담아야겠다. 더 이상 함정카드 같은 조각들은 넣지 말자.